성경묵상/야곱의 축복

야곱의 축복(2)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

I am a sojourner. 2024. 1. 3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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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9:5-7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생모 자녀 (출생순서)
레아 르우벤(1) 시므온(2) 레위(3) 유다(4) 잇사갈(9) 스불론(10) 디나()
빌하 (5) 납달리(6)
실바 (7) 아셀(8)
라헬 요셉(11) 베냐민(12)

 

르우벤의 다음 차례로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이 주어진다.

 

1. 이 두 아들에 대한 예언에서 야곱의 언어는 매우 부정적인 전망을 갖게 한다. 시므온과 레위는 르우벤을 이어 레아를 통해서 얻은 아들들로 이 둘은 아주 돈독한 친형제였다. 그런데 이 돈독함이 의를 이루는 일에 사용되기보다 악을 이루는 일에 남용되고 말았다. 야곱은 이 둘의 칼을 가리켜 잔해하는 기계로 불렀다. 악을 생산하는 기계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곧 창세기 34장의 디나를 강간한 하몰의 아들에 세겜에 대한 복수를 암시하고 있다. 이 둘은 디나와 결혼하기 위하여 세겜 성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한 후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들을 칼로 쳐 살육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야곱 가정은 디나의 강간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두 형제의 끈끈한 우정은 선을 이루기보다 악을 이루는 일에 더 과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주님의 뜻 안에 머물지 않는 친밀한 교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다윗과 요나단의 친밀함은 어떠했나? 요나단은 다윗이 자신의 아버지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보다 다윗을 돕고 격려하는 편에 서지 않았던가? 다윗을 돕는 것이 자신의 왕권을 포기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기보다 주님의 뜻을 따라 다윗을 도왔다.

이렇게 친밀한 사람들과의 교제가 주님의 뜻 안에서 이뤄질 때 자신을 양보하고 희생하여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으나, 주님의 뜻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주님의 나라에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당신은 형제처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뜻 안에 거하면서 그 뜻의 성취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고 있나? 아니면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세속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나?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악인들과의 교제는 당신은 더 깊은 죄악의 심연 속으로 천천히 끌고 들어간다는 사실을 밑줄 친 동사의 점층적인 변화가 보여주고 있다.

좇다-> 서다 -> 앉다.

이처럼 세속적인 교제는 단절하고 주님의 말씀에 기초한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자리에 서야 하지 않을까?

 

2.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이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의 분노와 혈기를 제어하지 않은 데 있었다. 시므온과 레위 둘 다 불같은 성격을 제어하지 않음으로 살육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처럼 제어되지 않는 분노와 혈기는 무서운 결과를 낳고 만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분노와 혈기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제어되고 있나? 야고보서 1:19,20은 이렇게 명령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빌립보서 4:26, 27도 동일한 교훈을 준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노와 혈기를 제어하지 않고 표출하는 사람은 자신의 화는 가라앉힐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는 없다. 제어되지 않는 분노와 혈기는 우리를 마귀에게 내어주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주님의 뜻을 대적하여 마귀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만다. 분노와 혈기를 제어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우리는 심판인 주님께 속했다는 성경의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모든 심판을 주께 맡기고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성경적 방법이다.

3. 열 두 지파 중에 흩어짐

야곱은 이 두 아들의 ‘모의나 집회’, 친교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이 두 지파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시므온은 가나안 정복 후 기업 분배 시에도 자기 기업을 얻지 못하고 유다 지파 중에 얹혀살게 된다(여호수아 19:9). 이들은 야곱의 예언대로 뿔뿔히 흩어져 살았다(역대상 4:39-43).

 

그런데 이런 시므온 달리 레위 지파는 어떻게 되었나? 그도 시므온과 함께 세겜 성 남자들을 몰살시킨 공범으로 시므온과 동일한 책망과 저주를 들었다. 그러나 출애굽 과정과 가나안 땅 진입 후 기업 분배 과정 중에서 레위 지피는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다. 물론 레위 지파 역시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흩어졌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을 받기 보다 더 놀라운 축복,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어주시겠다는 놀라운 복을 받았다.

 

똑같은 악을 범하여 똑같은 저주가 선언되었던 레위에게 이처럼 다른 장래가 펼쳐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여호와 편에 섰다. 출애굽기 32장 25-29절 말씀을 보자.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레위는 한 때 시므온과 함께 악을 공모하고 자행했으나, 이스라엘이 배교했을 때 돌이켜 여호와 편에 서서 여호와를 위하여 헌신하는 회개의 열매를 보여주었다. 이들에게 선언되었던 저주가 성취되기 전 이들은 확실한 회개의 열매를 보여주었다. 즉 이들에게 내려진 아버지의 저주선언, 심판 선언이 이들로 하여금 돌이켜 여호와 편에 서서 여호와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임종 시 선언되었던 저주와 심판은 사실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음성이었음을 알게 한다.

 

성경에 선언 된 저주와 심판 선언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그 대상에게 그 저주와 심판이 시행되기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라는 의미일까? 과연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자비하신 분일까? 결코 아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저주와 심판이 선언 된 대상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하여 미리 경고하신 것이다. 이 심판을 들은 대상이 돌이켜 회개의 열매를 보이면 그에게는 주님의 용서와 놀라운 은혜가 베풀어지나,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선언된 심판이 시행되고 만다. 시므온과 레위가 이 성경의 진리를 입증해 주고 있다.

 

성경의 경고를 읽을 때마다 당신은 어떤 자세를 보이나? 자신을 진단하고 돌이켜 회개하나? 아니면 주님의 심판이 당장 시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았나? 주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이유는 그 대상에게 충분한 회개의 시간을 주시려는 자비의 발로임을 기억하고 성경의 경고를 읽을 때마다 지체하지 말고 돌이키길 바란다.

 

 

-> 당신이 형제처럼 지내는 친밀한 사람들과의 교제는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나?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연합하게 하고 담대하게 만드나? 아니면 주님의 뜻을 대적하고 무너뜨리는 일에 담대하게 만드나?

 

_> 당신은 분노와 혈기를 제어하는 사람인가? 마음껏 표출하는 사람인가? 원수 갚는 것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의 심판에 맡기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신을 마귀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바치게 된다.

 

-> 당신은 성경의 경고를 대할 때마다 자신을 진단하고 돌이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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