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로 둔갑한 인본주의
교회의 역사 속에는 항상 경험론자들과 이성주의자들이 있었다. 이성주의자들은 이성에 의존하여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조명의 필요성을 거부하였다. 이에 비하여 경험주의자들은 이성을 배격하고 내면의 빛, 혹은 감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대표적으로 퀘이커교도들은 명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 느끼는대로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지나치게 의존함으로 결국 인본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버트런트 러셀은 닭에 관한 예화로 경험주의의 오류를 정확히 지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안의 동물들은 먹이를 주는 사람을 볼 때 먹이를 기대한다. 우리는 균일성의 모든 어설픈 기대들이 조잡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는 것을 안다. 닭은 일평생 매일 먹이를 줬던 사람이 마침내 그것의 목을 비틀어서 자연의 균일성에 대한 좀 더 고상한 관점을 닭에게 보여주는 것이 유용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들에는 오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겨우 어떤 일이 일정 횟수 이상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동물과 사람들은 그 일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능은 확실히 우리에게 내일 해가 뜰 것이라고 믿게 만들지만, 우리는 의외로 목이 비틀려진 닭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지 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과거의 반복되는 경험들이 반드시 미래에도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경험주의자들이 쉽게 빠지는 오류다. 이성주의자들의 주장도 그러하다. 이성적 판단으로 참된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
이처럼 경험주의와 이성주의가 한계에 부딪히자 칸트가 등장하여 이 둘을 합쳐서 진리를 추구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칸트의 노력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훗날에는 경험과 이성을 적절히 섞어도 진리를 알 수 없으므로 절대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헤겔이 등장하였다.
이렇게 이성과 경험을 어떻게 조화시켜도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는 어떻게 대답하는가?
어두운 방에서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려면 감각 기관보다 빛이 먼저 들어와야 한다. 마찬가지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경험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못하다. 이성 역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 자신에게 중점을 주는 인본주의는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와 기독교의 차이는 경험이냐 이성이냐의 문제보다 "타락한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 하나님의 빛, 조명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보편적인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이 이나다. 모든 개별적인 사람 하나하나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이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도 옳을 수 있고 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다. 이렇게때문에 인본주의는 결국 철저히 자기 중심적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지 타인이 아니다. 그래서 인본주의가 흥왕하면 결국 갈등과 분열이 초래된다.
김민호 목사님, 기독교 세계관 07 기독교로 둔갑한 인본주의의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