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공화국의 대표?
조선인민공화국의 대표는 누구였을까?
여운형이 일제말 조직했던 건국동맹이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된다. 이 건준이 해방 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더 바꾼다. 조선인공은 민족주의자와 중도좌파,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그 수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이 거의 장악한 조선인공의 주석으로 누구를 뽑았는지 아는가? 바로 이승만박사였다. 당시에는 이승만박사가 아직 귀국하기 전이었다. 부주석은 여운형, 내무부장으로는 김구가 선출되었다. 물론 이승만과 김구는 그 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하필 여운형이나 김구가 아니라 이승만이었을까? 그것도 공산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한 조선인공에서?
당시에 이승만의 절대적인 영향력때문이었다. 이승만을 내세우지 않으면 당시의 어떤 단체도 그 이름을 감히 내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영입하면 그 이름의 덕을 톡톡히 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해 줄 정도로 이승만을 지지하던 조선인공은 이승만이 그들의 입장을 따르지 않고 3.8선 이남 지역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자 그에 대한 온갖 거짓과 모함으로 그를 비난하였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들에 의해서 날조되고 왜곡된 사실을 진실로 믿고 이승만에게 분단의 책임을 돌린다.
당시 이승만의 영향력은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948년 5월 10일 선거로 선출된 200명의 국회의원들(대한독립촉성국민회(53석), 한국민주당(29석), 대동청년당(12석), 조선민족청년단(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2석), 기타정당(11석), 무소속(85석))은 국호와 헌법을 제정한 뒤, 정부조직법에서 7월 20일에 제 1대 대통령, 부통령 선거를 실시하기로 한다.
선거 방식은 국회재적의원 2/3이상 출석과 출석의원 2/3의 이상의 표를 얻어야 당선되는 간접선거였다. 후보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이승만, 무소속의 김구, 안재홍 3명이 출마했다. 선거 결과는 197명의 출석으로 진행 된 투표에서 이승만이 92.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김구는 13표, 안재홍은 2표를 얻었으며, 기권이 2표였다.
당시 전 국민의 인식가운데 이승만의 위치는 그만큼 대단했다. 공산주의자들도 그의 이름의 영향력을 이용하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소련과 북한의 계략을 간파하여 좌우합작을 진행하던 미국을 설득,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게 하자 그에 대한 온갖 거짓 모함과 비방으로 깎아내렸다. 그러한 잘못된 정보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이승만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국가를 설립해 주고, 토지개혁과 교육혁명을 통하여 산업화와 민주화의 틀을 마련해 준 그의 공이 통째로 부정되고 있다. 이승만에 대한 거짓으로 조작되고 왜곡된 정보가 어디 이뿐이랴? 김구는 띄우면서 이승만은 한없이 깎아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