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대한 역사왜곡
저는 한 때, 백년 전쟁의 역사 왜곡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승만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나 비슷한 팟캐스트, 팟빵을 통하여 왜곡된 정보를 접하므로 그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된 것처럼 저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들으면서 이승만이 그 정도로 파렴치한이었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위키피디어를 시작으로 그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대부분이 왜곡된 정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역사를 좋아했기에 긔에 대한 탐구는 아주 흥미로운 과정이었는 데, 이승만은 결코 친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일본에 강한 적대감을 품었을 뿐 아니라 Japan Inside Out을 통하여 일본의 속내를 드러내며 미국 본토 공격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친미가 아니라 용미주의자였으며, 한 때 미국에 의해서 제거 대상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 자유독립국가, 공화국 수립의 이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자료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왜 모든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는지, 왜 이승만은 외교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승만에게는 잘못된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치적을 덮어버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모았던 자료들을 하나씩 나누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갖고 계신 분들이 너무 많기에... 별로 중요한 내용은 없어 보이지만 저한테는 꽤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왜곡된 정보나, 첨가할 사항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여나 제가 편향된 정보 만을 얻은 것은 아닌지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 언급된 내용에 대해서만 의견을 달아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1)제국신문
제국 신문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민족대표 33인의 하나였던 이종일이 자금을 대고, 이승만이 주필로 1898년 8월 10일에 창간한 신문이다. 당시 무능한 정부와 관리의 부패 및 일본세력의 국권침탈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한 민족주의신문으로서 중류 이하의 백성들을 독자층으로 삼은 순 한글로 발행 된 신문이다.
1898년 8월 29일에 제국신문에 대한 사람 봉변당한 사실이 짤막하게 게재되고, 그 다음 날 이 사건에 대한 논설이 실린다.(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
한 일본인이 배를 사서 껍질을 벗겨서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대한 사람(강홍길) 하나가 침을 잘못 뱉어서 그만 그 일본 사람의 옷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인이 배를 깎던 칼로 그 조선인을 찔렀다. 급소는 피했지만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곧 조선 순경이 왔다. 가해자가 일본 사람이니까 가만히 쳐다보며 서 있었다. 잠시 후 일본 경찰이 오더니 가해자를 체포하기 보다는 오히려 보호하려하자, 수 백 명의 대한 사람이 우리 앞에서 가해자를 처벌하여 주기를 요구하는지라, 이에 칼집으로 백성들을 위협하여 해산하려고 하자, 조선 순경이 일본 순경의 명을 받고 백성들을 해산시키려 했다. 백성들이 물러서지 않자, 일본 경찰은 두 사람을 잡아서 일본경찰서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에 백성들이 분개해서 왜 대한 사람을 일본 경찰서로 끌고 가냐고 항의하자, 일본 경찰은 많은 백성들을 폭행하여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고, 어린 아이 하나를 강제로 잡아서 일본 경찰서로 들어갔다. 이에 일본영사관에 가서 항의했으나 이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백성이 유혈이 낭자하도록 맞으며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경무청에 가서 이 사실에 대해서 항의하려고 하자, 조선 경찰들도 백성들을 위협하여 물러가게 하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몇 명이 경찰서에 들어가서 사건을 설명했으나, 조선 경찰에게도 아무런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주필이었던 이승만은 제국신문 4면 중 2면 반을 할애해서 이 기사를 게재하였다. “내 백성이 피를 흘렸는데, 도대체 어디 가서 항의하란 말이요?” “조선의 경찰은 백성이 낸 세금으로 매월 7,8원씩 받고 이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직책이 아니라 이 백성을 약하게 하는 것이 직책이오?”
구한말 대한제국이 힘을 잃었을 때 우리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마구 칼질을 해도 도대체 항의할 수 있는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약한 나라였다. 이 기사가 게재되자, 한성신보(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아다치 겐조, 기쿠치 겐조, 구니토모 시게아키 등이 일본 외무성과 주한 일본 공사관의 원조를 받아 1894년 말에 창간한 신문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고, 이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기사들을 게재)는 9월 11일자 신문에서 제국신문이 작은 사건을 침소붕대했다며, 그 기사를 쓴 기자 이승만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한다. 이에 이승만은 9월 14일 논설에서 이 일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한성신보의 기사를 반박하였다.
이 뿐 아니라 이승만은 고종의 외국인 용병사건에도 적극 개입한다. 1,898년 9월 15일 고종은 퇴역 군인 등 외국인 30명(영국9명, 미국인 9명, 독일인 5명, 프랑스인 5명 러시아인 2명)의 용병부대를 통하여 황실호위를 맡기려고 했다. 독립협회는 9월 17일에 급히 회의를 열어 외국인을 고용하여 황실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적 수치라며 각 부에 총대위원을 보내기로 결의한다. 이 중 이승만은 궁내부 총대위원으로 선정된다. 이 역할에 더하여 이승만은 9월 18일자 논설에서 “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하여 외국 사람을 청하여다가 대궐을 보호하는 일은 세계에 나라되고서야 어디 있을 일이요.....이것은 세상에 사람이 할 일이 아닌 즉 세계에서 야만으로 대접할 터이니....” 이러한 제국신문의 압력 및 독립협회의 항의로 결국 고종은 외국인 용병설치 계획을 포기한다 .
2)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이 외에도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와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는 민족적 정책을 택할 것을 고종 황제에게 요구하였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간부들을 체포 투옥시키려 했으며, 정부의 요직을 제시하며 회유하기도 했다. 당시는 친러파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였는데, 그는 친러파에 대항하는 연설을 많이 했다. 특히 독립협회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을 때, 그는 숨기보다는 수천 명의 군중들과 함께 체포된 간부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주도하면서 청년 혁명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수구파는 이런 만민공동회의를 폭력으로 진압하려고 했으나 외국 사절들의 반대로 폭력 행사를 삼가게 된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 불안을 느낀 그의 아버지는 "승만아 너는 우리 집 안의 육대독자다."라면서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승만은 흔들림 없이 수감된 17명의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여 그들의 석방을 이끌어 낸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 이승만과 만민공동회의야말로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우리나라 최초의 촛불 혁명가(?)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제국신문의 논설과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의에서 그의 활약을 보았을 때 그의 관심은 친일도 친러도 아니라, 외세에 의지하지 않는 자유독립국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국신문, 한국근대사산책 3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