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묵상/마태복음 묵상

마태복음의 족보

I am a sojourner. 2024. 2. 9.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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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사진출처:https://biblestudyresources.org/genealogy-of-jesus/>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정리한 책을 썼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태복음의 결론부에는 모든 민족에게 가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함으로 마태복음 전체의 내용이 모든 민족에게 가르쳐야 하는 복음의 내용이라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태는 1-3장까지 예수님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베들레헴에서의 탄생과 애굽 피난, 나사렛에서의 성장을 소개함으로 이 모든 일이 구약 성경의 성취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3장에서는 세례 요한의 출현을 소개합니다. 이 역시 이사야와 말라기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신분을 소개하는 첫 번째 주제인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족보는 언약 성취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첫 번째 자료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족보를 통하여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라는 사실을 교훈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말해줄까요? 우선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인물들을 보세요. 가장 먼저 언약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등장합니다. 그 다음 야곱의 12아들 중에서 특별히 유다가 메시아의 조상으로 선택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 구약 성경에서 유명한 라합과 보아스가 나옵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증손자가 다윗입니다. 그 다음에는 다윗의 뒤를 이은 유다의 왕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가 멸망한 후 족보가 계속 이어져서 예수님의 육적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 나오게 됩니다.

 

마태는 이 족보를 통하여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16절을 보세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2절부터 마태는 ‘낳고’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의 그의 형제를 낳고..이 규칙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까지 쭈욱 이어집니다. 그런데 16절 하반절,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할 때는 이 규칙이 갑자기 깨져버립니다. 어떻게 깨졌을까요? ‘낳고’라는 말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시니라’가 등장합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아브라함부터 마리아의 남편 요셉까지 부모가 낳았습니다. 부모의 역할을 나타내주는 말이었습니다. 출생한 아기는 수동적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 장면에서는 이 역할이 바뀝니다. 원문에서 읽어보면 주님 스스로 나오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에서는 마리아는 단지 주님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잉태되심으로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마리아는 수동적인 역할만을 감당했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함으로 무엇을 조명하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언약의 성취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의 1차적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을 취하심으로 언약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족보는 주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말해줍니다. 이 족보에 오른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세요. 과연 이 족보에 오를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있습니까? 우선 아브라함부터 이 족보에 오를만한 인물이 못됐습니다. 그는 순전히 주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로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의 역사로 믿음의 조상다운 모습을 갖춰가게 됩니다. 처음부터 믿음의 조상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불신앙과 불순종의 조상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죠? 그는 주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두 번이나 기근이 들었을 때 가나안 땅을 이탈했습니다.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을 믿지 못하여서 애굽에서 얻은 하갈을 통하여 언약을 자신의 힘으로 이뤄보려는 죄도 지었습니다. 주께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100세되었을 때 아들을 주시자 비로소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 족보에 오를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반복적으로 주님을 믿지 못하는 그를 일방적인 은혜로 그가 언약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야곱은 거의 그 이름 그대로 사기꾼이었죠? 그 역시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언약의 조상다운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특별히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 된 유다를 보세요. 만약에 자격과 조건을 따진다면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될 최적임자는 당연히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를 택하셨습니다. 유다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 족보에도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 한 마디로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3절을 보세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이 누구였습니까? 그의 며느리였습니다. 만일 당시 신문들이 ‘며느리를 통해서 자식을 낳은 유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작성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댓글들이 달렸을까요? 유다 같은 사람이 어떻게 메시아의 조상이 될 수 있냐? 우리 유대인들의 수치다. 우리 더 이상 그런 문란한 조상의 이름을 쓰지 말자. 유다 말고 괜찮은 조상 없냐? 그 사람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자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어디 유다의 후손 중에 그럴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잘 보세요. 그럴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다윗은요? 마태가 다윗을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하필 다윗의 가장 큰 치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세상에 솔로몬을 밧세바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집안의 수치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마지막 임종 전에 자신의 아들들에게 축복하면서 유다에게 이런 예언을 남겼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기 49:10).” 주님은 이 약속에 근거해서 유다 지파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죠? 이는 결코 유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떤 놀라운 공적을 세워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다윗 이후에 유다를 통치한 왕들을 보세요. 제대로 된 왕은 몇 명 없습니다.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를 제외하면 솔로몬처럼 나라를 이방종교와 혼합시킨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왕들을 통해서도 주님의 언약이 지켜집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도 이 언약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언약 백성의 구별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에도 주님의 언약이 계속 유지되었음을 이 족보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보여줌으로 무엇을 조명해 주고 있습니까? 메시아의 도래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언약 성취의 도구들로 부름 받은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주님의 언약이 늘 위기에 처하곤 했었죠?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절대적 은혜로 그 인간도구들을 통하여 결국 이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이 족보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 족보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편견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를 보시면 5명의 여인이 나옵니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 이 중에서 라합, 룻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특별히 라합은 기생, 창기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조상 중에 이방여인이 포함되어 있으면 어떻습니까? 예수님 뿐 아니라 유대인 전체가 순수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솔로몬은 무려 1,000명의 이방인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솔로몬의 후손으로 태어난 왕들이 과연 순수 혈통, 유대인으로 볼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솔로몬 시대에 이방인들과 함께 혼혈이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로흐보암은 암몬 사람 나아마를 통해서 낳았습니다. 이 사실을 열왕기상 14:21, 31에 두 번이나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자기 아들을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과 결혼시켰죠? 이세벨은 시돈 여인이었습니다. 여호람도 혼혈아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혼혈이라고 아예 이방인으로 규정해 버렸죠? 그들이 귀하게 여긴 메시아의 족보에는 이미 이방인들의 피가 섞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마태는 이 족보를 아브라함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함으로써 주님의 언약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의 언약이 과연 아브라함의 후손들만 위한 것이었나요?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3을 보세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혜택은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주어진 언약이었습니다.

 

이 족보는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언약의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됨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통하여서 성취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삶, 복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들이 다 우리 주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함으로 이 언약의 성취를 이루게 합니다.

 

이 족보는 이렇게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그들이 민족적 편견으로 간과했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사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혹시 유대인들처럼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까? 주변 사람들을 주님 앞에 인도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신을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삶을 사시길 부탁드립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마태는 이 족보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주님의 언약 성취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언약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사실을 조명해 줍니다. 두 번째, 이 족보는 주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설명해 줍니다. 인간의 공로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음을 강조해 줍니다. 세 번째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결국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됨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언약의 혜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족보에 나타난 주님의 언약의 신실성과 은혜의 절대성을 신뢰하며 의지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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