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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히스기야의 기도

이사야 37:5-7 주님의 응답

by I am a sojourner. 202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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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6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7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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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히스기야에게 주시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앗수르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에게는 승리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헤립에게는 심판 시행 선고였습니다. 첫 번째 필승공식, 두 번째 필패공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필승공식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앗수르 왕이 주님을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그의 군대가 물러갈 뿐 아니라 결국에는 칼에 죽게 된다는 내용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모든 사태의 주도권은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국 동쪽에서 일어난 바벨론의 반란을 진압한 후, 제국의 서쪽에서 앗수르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결성된 애굽을 중심으로 한 반앗수르 동맹국들을 완전히 격퇴시켜 버렸습니다. 이 동맹에 참여했던 유다 역시 앗수르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유다의 모든 도시는 앗수르의 말 발굽 아래에 완전히 짓밟혔습니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으며 군사들과 저항하는 사람들은 꼬챙이로 찔러 죽여서 매달아 놓거나, 산채로 가죽을 벗겨서 죽이는 잔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최후의 방어선인 예루살렘 성을 185,000의 군대를 보내서 완전히 포위해 버렸습니다. 185,000의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면 몇 수십 겹으로 포위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포위를 한 다음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라도 예루살렘을 우리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말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능욕하였습니다.

 

산헤립이나 그가 보낸 랍사게, 앗수르 군인들이나 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백전백승이었거든요. 그리고 예루살렘은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였습니다. 전쟁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다. 승리도 우리 거다. 이미 이런 자신감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렇게 아무런 소망도 기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님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앗수르의 공격을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경고를 두 번이나 무시하고 세속을 의지한 자신의 불신앙에 대한 징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세속적인 방법이 아닌 주님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본바와 같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돌이키자 주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가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예루살렘을 구할 수 없다고 했지? 그거 하나도 겁낼 것 없어!”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앗수르 왕이 모든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주께서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완전한 항복으로 승리를 자신했던 산헤립은 철저한 패배와 함께 그 자신도 칼에 죽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누가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습니까? 산헤립이 아닌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히스기야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실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죄에서 돌이켜 주님만 신뢰하고 맡기는 신앙 자세를 회복함으로 승리는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에 아주 작은 아이 성 싸움에서 패배한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아이 성은 백성들이 보기에 한 삼천 명만 올라가도 충분히 정복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보잘 것 없는 아이 성 싸움에서 그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패배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여리고 성 정복 후 아간이라는 사람이 주님께 바쳐야 할 노략물을 훔친 일이 있었죠? 여기에 한 가지 더 패배 요인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 정복 후 마음이 교만해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천 명만 올라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인식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 정복은 그들의 실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인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승리감에만 도취되어 마치 자신들의 힘으로 정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물으며 주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어떤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한 삼천 명이면 정복하겠네!” “저렇게 조그만 성인데 뭘 다 올라가!” 이런 교만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주의 임재가 함께 하지 않음으로 아이 성에서 어이 없는 패배를 맛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이 성 공격에서는 승리합니다. 어떻게요?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했거든요. 죄에서 완전히 돌이켜 다시 겸손하게 주님만 의지하는 자세를 회복했거든요. 지금 히스기야 왕도 이 공식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 아닌 세속을 의지하던 자세를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 다음 수순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임재를 회복과 승리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공식은 간단합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의 임재를 회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기보다 세속을 의지하면 히스기야의 연속되는 패배와 아이 성 싸움의 패배가 말해주듯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만 겸손히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속을 의지하던 태도를 완전히 버리고 주님만 신뢰하며 겸손히 의지하는 자세를 회복하게 되자, 주님은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패배공식이 아니라 승리 공식을 기억하고 늘 주님만 신뢰하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필패공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앗수르 군대와 산헤립에 대한 심판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에게 선언 된 심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주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앗수르의 심판을 경고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10:12-14입니다.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13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14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어쩌면 랍사게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항복을 종용하기 위하여 사용한 메시지와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대왕 산헤립의 손에서 그 백성을 구원한 신이 누구냐? 아무도 없다. 예루살렘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라도 예루살렘을 구원할 수 없다.” 산헤립은 자신을 하나님의 수준까지 끌어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10:15-19에 앗수르의 교만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리고 10:24-27에서 다시 한 번 더 경고가 주어집니다. “24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25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같이 하실 것이라 27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앗수르의 죄에 대한 완전한 멸망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이러한 경고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은 한때, 요나를 통해서 주시는 경고를 듣고 죄에서 완전히 돌이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범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그들에게 요나를 보내셨던 것처럼 이사야와 나훔 선지자를 통하여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습니다. 요나의 경고를 듣고 돌이킨 것철머 그렇게 돌이킴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왜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심판 경고를 무시한 것입니까? 교만함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함에 취하여 나무뿌리에 도끼가 놓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심판을 걱정해야 할 때에 예루살렘이 곧 자신들 앞에 굴복하게 된다는 헛된 기대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성공의 경험은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심판을 경고해도 귀담아 듣지 않게 합니다. 주님의 심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잠언 16:18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그는 이렇게 패망 공식에 들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개구리가 곤충을 사냥할 때 그것만을 응시합니다. 그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하여 뱀이 응시하고 있어도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오직 잡아 먹을 곤충만 바라보며 기회를 엿볼 뿐입니다. 또 뱀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는 독수리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올 개구리만 시야에 들어올 뿐입니다. 또 독수리는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냥꾼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직 뱀만 바라볼 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당장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냥감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자신이 누군가의 먹이가 된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진행된다는 착각에 빠지면 이렇게 자기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위험을 인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변을 둘러봐야 합니다. 성공이 축적될 때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오히려 더 주변을 둘러봐야 합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멸망을 피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사람의 일이 자기 계획대로만 된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인생은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주님의 뜻이 있을 때, 주님의 승인이 있을 때만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허탄한 자랑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앗수르의 교만은 축적된 성공의 경험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이 교만함 때문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의 칼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계속해서 주어진 경고를 무시하고 주님을 조롱했던 앗수르를 심판하심으로 주님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앗수르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서 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세속을 버리고 주님만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세를 회복한 히스기야에게 주님은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돌이킨 자들은 주님의 임재를 회복함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교만함으로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도취되어서 심판의 칼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멸망을 준비해야 할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상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앗수르의 실패를 따르지 않으려면 늘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진단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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