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태복음 5,6,7장은 산상수훈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치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교훈해 줍니다. 가장 먼저 팔복을 통하여 주님 나라의 백성이 추구해야 할 행복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주님은 외적인 조건에서 행복을 찾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행복은 내적인 것임을 교훈해 주십니다. 먼저, 세상이 추구하는 복, 두 번째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복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세상이 추구하는 복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5:1-12절에서 말하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제발 자기에게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내용들뿐입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복과는 정반대의 것들을 행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행복은 내적인 것으로,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환경이 줄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라는 것은 너무도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뿐입니다. 물질, 건강, 성공이 주는 행복은 아주 잠시뿐입니다. 잠시 누리고 있으면 더 갖고 싶은 탐심 때문에 만족할 줄 모릅니다. 또 이런 것들은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반면에 주께서 말씀해 주신 행복은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커지면서 궁극의 완성을 향하여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복이 무엇이었기에 주님은 복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내리셨을까요?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치하에 있었습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 이후 그들은 계속하여 식민치하에서 살았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헬라제국, 헬라제국을 멸망시킨 로마에 의해서 무려 600여년을 다른 나라의 압제가운데 살아야했습니다. 당연히 다른 나라의 지배가운데 살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민족만 이들을 괴롭혔을까요? 로마 정부에 협조하는 세리들과 군병들은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나았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인 사두개인들은 성전 제도를 통하여 막강한 부를 쌓으면서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백성들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식민 통치자, 그들에게 부역하는 자들, 종교권력자들에 의해서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정치적, 사회적 배경가운데 유대인들은 행복의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다윗과 같은 왕, 정치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줄 수 있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완전한 율법준수를 통하여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으나 그것은 자기만족과 도취에 불과했습니다. 현실주의자요 자유주의자로 부를 수 있는 사두개인들은 현실적 이익만 추구했습니다. 이익추구를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세네파라고 해서 세속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 때 행복이 온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속과 완전히 동떨어진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또 셀롯당이라는 혁명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정부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혁명을 통하여 로마를 내쫓으면 행복이 올 수 있다고 믿고 있었죠.
이처럼 당시의 비참한 삶을 살면서 백성들은 각자의 행복의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그런 것들이 행복의 절대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문을 통하여 선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외적 조건에서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훈하셨습니다.
만일 이런 외적 조건들을 통하여 행복이 와야 한다면 가장 행복했어야 할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이 헛되며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의 모든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다 누려봤지만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침표를 딱 찍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교훈하는 전도서라는 설교집을 내놓았습니다.
우리의 외적 조건들로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되었는지 요즘에는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수필집에서 사용한 표현이래요. 행복은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깨끗한 옷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어차피 큰 행복은 순간이니까 이런 작은 행복들을 누려보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소소한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산상수훈에서 교훈하십니다. 한 청교도 목회자(토마스 왓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쁨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마치 마당에 새들이 잠시 잠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가까이 가면 금방 날아가 버린다.” 세상적인 기쁨과 행복이 이러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수님은 물질이나 정치적 환경의 개선, 세상과의 단절, 율법 준수, 현실적 이득과 같은 외적 조건에서 행복을 찾고 있던 사람들에게 거기에는 행복이 없음을 선언하셨습니다.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 다윗 왕국의 재현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자신은 그런 메시아가 아님을 본문을 통해서 천명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외적 조건이 개선되면 잠시 잠깐은 행복감에 젖을 수 있지만, 잠시 느낀 그 행복의 깊이만큼 금방 공허함에 사로잡힙니다. 궁극적인 행복은 이 세상의 조건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께서 주시는 궁극적인 행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의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 행복의 조건과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교훈해 주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복을 한 번 살펴보세요. 심령의 가난함, 애통,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함, 화평케 함, 의를 위하여 핍박받음, 딱 한눈에 봐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아니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이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추구했던 복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경에 처했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요? 주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복은 모두 우리의 내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환경들이 바뀌어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행복을 얻은 대표적인 사람이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세리장이었으니까 사회적 지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외적 조건에 만족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리서라도 보기 위하여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주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시자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토색한 것의 4배로 갚아주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진정한 행복, 물질적 부유와 사회적 지위가 줄 수 없는 영혼의 만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은 외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 늘 주님을 가까이하고 닮아가는 삶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주며, 이 만족은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들 만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사실을 이어지는 말씀에서 교훈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과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주께서 교훈하신 행복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행복의 조건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이 보여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유대 사회에서 출교 당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 경제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복음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전했습니다. 왜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복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안정감이 줄 수 없는 복이 복음 안에, 주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온갖 부정적인 편견과 선입관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을 부인하면 예전처럼 경제활동, 사회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해도 그들은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미쳤거나 아니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진짜 행복을 얻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요16:33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환란 속에 있지만 주님 안에 있으면 평안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이들은 환란 속에서 주님 안에 거함으로 평안과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핍박을 받을 때 그들은 분노하고 보복하겠다고 외치는게 아니라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로 그들을 용서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모습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궁금증과 함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거를 부러워할까요? 자신들은 로마의 수많은 신들, 경제적인 풍유로움에도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만족을 그들의 미소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며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방법으로 로마 제국 전체로 확산되어 결국 로마를 정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행복으로 알고 있나요? 진정한 행복은 외적 조건이 아닌 우리 내면에 달려있습니다. 그 어떤 세상적인 조건들로도 근원적인 우리의 내적 갈증을 해갈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은 끝없는 갈증만 유발할 뿐입니다. 우리의 내적 갈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될 때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온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행복, 우리의 영혼의 진정한 만족을 주는 행복을 얻게 됩니다. 이 행복을 누리며, 이 복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행복을 누리고 계신가요? 아니면 이런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을 추구하면서 늘 불만족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면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에서만 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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