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주님은 산상수훈의 팔복을 통하여 이상적인 신자의 상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는 당시의 유대교의 종교체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배우게 될 6번째 복, 마음의 청결함도 유대교 안에서는 배울 수 없는 가르침었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교훈하신 이상적인 신자의 상 가운데 하나인 마음의 청결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께서 마음의 청결함을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수많은 정결예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는 위생을 위하여 손을 씻은 게 아니었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다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율법에서 규정하는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그들이 만진 물건을 만지면 자신도 부정케 되니까 이런 정결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피부병이나, 고름, 월경 중인 여성, 시체나 동물, 곤충의 사체, 이방인과 접촉하거나 그들이 만진 물건을 만지면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런 율법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게 되었을까봐 외출 후 집에 들어오거나 음식을 먹기 전에 항상 종교적 정결 의식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이는 모세 율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 모세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하여 조상들이 고안해 낸 관습, 장로의 유전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주께서 포도주로 바꾸신 물이 바로 이 정결예식을 위한 물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들은 잔과 그릇 같은 것들도 열심히 닦았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이런 그릇들은 이방인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열심히 닦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열심히 닦았을까요? 이런 정결예식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주님 앞에서 깨끗하게 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는 손으로 떡을 먹는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곧바로 주님께 항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부지런히 씻고 닦았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들의 열심을 보시고 정결예식으로는 결코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없음을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3:25-28입니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유대인들은 외적 성결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를 위하여 열심히 손을 닦으며 잔과 그릇들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외적 성결에만 치중했던 이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신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겉으로는 굉장히 의롭고 깨끗해보이지만 그들의 마음 속이 얼마나 더럽고 부정한지를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죄인으로 규정해 놓았던 문둥병자들, 세리나 창기보다 더 부정하다고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외적 성결이 아니라 마음의 청결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 나갈 때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우리의 열심, 봉사, 헌신은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처럼 다 낡은 옷과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주 앞에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의로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전체 삶을 돌아보았을 때 과연 주님께 자신 있게 내어 드릴 것이 더 많을지 아니면 감추고 싶은 것이 더 많은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성경을 조금 많이 읽고 기도 생활도 잘하고, 봉사나 헌신을 열심히 했으면 뿌듯한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오기도 합니다. 정반대로 세상적인 일에 더 많이 매달렸으면 죄인 된 심정으로 나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주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유대교나 천주교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봉사나 헌신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하는 보속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로 우리의 죄를 씻어서 하나님 앞에 조금 더 의로운 존재로 서게 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거룩하신 주님 앞에 내세울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분께 우리가 감히 무엇을 떳떳하게 내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 자체가 교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인답게 살았다는 것이 우리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없음은 그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하신 주님의 임재 앞에 서보니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죄인인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끼리 있을 때는 누가 조금 더 괜찮은 신앙인인지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일반 백성들과 비교하여 자신들이 의롭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룩과 공의의 본체이신 주님이 보시기에는 더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열심일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외적인 정결함을 가지고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열심과 헌신과 봉사도 우리를 주 앞에 의롭게 만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완전히, 겹겹이 덮을만한 우리의 내면의 죄악과 부정함 때문입니다. 주님은 외적 정결이 아니라 내적 정결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이 여섯 번째 복을 통하여 교훈하여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마음의 청결함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깨끗한 마음, 청결한 마음으로 주 앞에 나갈 수 있을까요? 청결하고 깨끗한 마음이란 아무 것으로도 오염되지 않은 마음이란 의미인데요. 이는 죄악된 본성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는 실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예레미야 17:9)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의 부패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으로 주 앞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수훈의 구조를 한 번 살펴보시면, 첫 번째 복부터 4번째 복까지와 5번째 복부터 8번째 복이 서로 병행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이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첫 번째 복이 심령의 가난함인데, 심령의 가난함으로 자신 안에 주님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절망가운데 주님의 자비만 의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5번째 복이 바로 긍휼, 자비를 베푸는 복입니다. 두 번째 복인 애통함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탄식하며 슬퍼하는 자를 주께서 그 죄를 용서하심으로 위로하여 주시는 데, 이 두 번째 복과 병행을 이루는 복이 6번째 복인 마음의 청결함입니다. 세 번째 복인 온유한 자는 화평케 하는 자와 연결이 되고,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복으로 연결이 됩니다.
이러한 산상수훈의 구조를 통해서 보았을 때 두 번째 복인 애통과 여섯 번째 복인 마음의 청결이 의미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시겠죠?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인하여 탄식하는 사람은 애통함으로 주 앞에 나오게 되고 주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위로하여 주시죠? 마음의 청결함은 바로 주님의 죄 용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의로운 행위보다 불의한 행위가 더 많기에 주 앞에 나올 때 마다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을 의지함으로 깨끗함을 입고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3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청결함을 얻을 수 있음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거듭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 사함을 받을 때 비로소 마음의 청결함을 입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3:9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은 자신이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에게서 온 의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우리가 주 앞에 나갈 때 의지해야 될 의로움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이라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고 청결한 마음을 갖게 해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의 청결함으로 주님 앞에 나가려면 늘 주님의 대속 죽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의 부패함을 일깨워주는 주님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해 진다고 교훈하여 주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킬까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킬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성화의 수단이 된다는 뜻입니다.
늘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고 싶으세요? 그러면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자신을 살피며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새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오류와 교만함에 빠지고 맙니다.
시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다윗이 밧새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죄에 대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돌이킨 후 기록한 시입니다. 그는 이 시에서 마음의 청결함, 진실함을 회복하고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있나요? 너무 쉽게 죄악으로 치달으며, 조금만 괜찮게 신앙 생활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금방 위선과 교만으로 높아지는 우리의 마음을 주의 말씀을 통하여 늘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나를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는 다윗의 기도를 고백하며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 말씀은 우리의 외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청결함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외에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며 주 앞에 나오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늘 주님의 대속 죽음을 의지하며 주 앞에 가까이 나가는 삶,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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