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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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2절까지 팔복을 통하여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교훈하심으로 이상적인 신앙인의 상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소금과 빛의 은유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교훈하십니다.

먼저, 누가 소금과 빛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라, 세상의 빛이 되라는 명령형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 1:8 말씀과 똑같은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형이 아닙니다. “내 증인이 된다”는 직설법,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는 표현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해 주셨을까요? 바로 앞에 주어진 팔복과 연결해서 잘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을 가지고 주 앞에 나옵니다.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은 사실을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인 온유함으로 따뜻하게 대합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는 의로움이 전혀 없음을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만을 의지하며 늘 자신을 낮춥니다.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죄에 빠진 동료 그리스도인들이나 죄인들을 바라볼 때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합니다. 이렇게 늘 주님 앞에서 자신을 진단하고 성찰하니까 당연히 마음의 깨끗함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하여 화평케 하는 삶,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주께서 주신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자신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리도 피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런 사람이 어떻게 소금과 빛이 아닐 수 있을까요? 이렇게 늘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늘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 주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의 깨끗함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사람,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핍박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소금과 빛이 아닐 수가 없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가 왜 소금과 빛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까요? 주께서 복으로 제시해 주신 이 여덟 가지 복을 진정한 신앙인의 복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제시해 주신 이상적인 신앙인의 삶의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힘쓰기보다 세속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복에 대한 개념이 흔들리니까 이런 이상적인 신앙인의 삶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소금과 빛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신자의 고유한 특성을 점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중에 키에르케고르가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윤리 시간에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보셨죠? 그는 당시 부패한 덴마크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요. 특별히 기러기와 거위를 소재로 삼은 우화를 많이 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철학자 거위라는 우화입니다.
철학자 거위가 농가 마당에 살고 있는 동료 거위들에게 말합니다. “이 마당이 세상의 전부가 아냐, 울타리밖에는 사막의 황무지와, 바다와, 푸른 골짜기와, 나무가 우거진 산이 있어. 우리는 이 농가의 마당에 갇혀 날개는 접혀 옆구리에 박혀있지.” 이 말을 들은 거위들이 감동했습니다. 철학자 거위의 교훈에 영감을 얻고 토론하고 분석하고 비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안한 게 있습니다. 뭔지 아세요? 날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농장에는 있는 옥수수는 여전히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농부가 지켜주는 앞마당이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감동만 할 뿐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죠?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주께서 제시해 주신 복을 추구하지 않을까요? 그런 복을 추구하지 않아도 별 불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예배당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 괜찮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청년들과 함께 계룡산 아래에 있는 콘도로 수련회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 정상 좀 찍고 내려오자고 말했습니다. 그때 수련회에 꽤 많이 왔거든요. 1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는데요. 정상까지 올라간 인원이 4명밖에 안됐습니다.
저 친구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고 싶었거든요. 마음 약한 친구들 4명이 올라왔는데요. 올라가면서 온갖 불평과 원망을 다 쏟아놓는 거예요. 우리 죽이려고 올라왔죠? 그런데 이 친구들이 정상에 딱 올라선 순간 그 모든 불평과 원망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날 날씨가 정말 좋았거든요. 자기들끼리 막 사진 찍고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한참을 정상에 있다가 내려갔습니다.
산 아래에 있던 친구들에게 얼마나 멋있었는지 설명하니까, 그 친구들의 반응, “우리는 정말 시원했어요. 에어컨 밑에서 시원한 커피 마시며 시원한 계곡물을 바라보고 핸드폰 보고 있었어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안 올라가봤으니까요. 굳이 올라가지 않아도 아래서 재미있게 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주께서 교훈해 주신 이상적인 삶, 가장 복된 삶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세속이 주는 옥수수 몇 알에 만족한 삶을 살고 계시나요?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13, 14절에서 부정문으로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맛을 잃은 소금은 필요 없습니다. 등경 아래에 둔 빛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부정적인 문장을 통하여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 등경 아래에 둔 등불처럼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구원하신 성도들이 과연 이렇게 안주하는 삶을 보시고 가만히 계실까요? 아니겠죠? 나태한 우리를 끌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십니다. 징계와 시련을 통하여 연단하셔서 결국은 복된 신앙인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강제로 복된 삶을 사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팔복을 기억하며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소금과 빛은 바로 주께서 교훈해 주신 복을 추구하는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두 번째, 소금과 빛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소금과 빛의 고유한 역할은 부패를 막고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패를 막는 일, 어둠을 밝히는 일은 누구만 할 수 있을까요? 팔복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바라보고 그 복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할 수 있을까요? 정치인이 주께서 말씀하신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의 선행은 다 본인의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인의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원인도 의인 10명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타락하면 당연히 그 사회도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돌이킨 사람들이 평양의 분위기 전체를 바꿔놓았습니다. 기생학교가 있을 정도로 환락의 도시였던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흥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교회가 당시 부패한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을 끌어 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교회의 수준과 세상의 수준이 똑같아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팔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16절은 8복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의 역할을 이렇게 규정해 줍니다. 우리가 주께서 말씀해 주신 복을 추구하면 어떻게 될까요?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팔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아버지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아버지를 칭찬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은 이 착한 행실을 무엇으로 바꾼지 아세요? 믿음의 선포라는 아주 쉬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하면 저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어둠의 영들이 물러가서 아버지께 나올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선포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기독교에 적대적입니다. 왜요? 선포만 할 뿐 어떤 선도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착한 행실이 저들을 감동시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나요? 정반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팔복은 뒷전으로 미루고 자기 몸집 불리기에만 바쁩니다. 그래서 몇 천억씩 들여서 교회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10년 전 기준으로 한국교회의 금융권 대출 규모가 무려 10조였습니다. 매달 이자만 600억이었습니다. 원금과 이자를 합하면 일년에 3조원이 대출 변제를 위해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액수로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겠죠? “저 사람들 진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네!”라고 칭찬하면서 우리를 예수쟁이가 아닌 그리스도인, 작은 그리스도로 부르지 않을까요? 그런데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조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몇몇 물의를 일으키는 교회들이 이런 빌미를 제공한 것은 사실입니다. 만일 이 사회 곳곳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기독교인들의 평상시의 모습이 소금과 빛처럼 늘 남을 도와주는 일에 힘썼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요? “저 사람들이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그들을 혼내겠죠. 그러나 기독교인들을 만난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아무런 다른 점, 구별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롱과 비방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분들이랑 제가 조금 친하게 지내는데요. 그분들 중에 한 분이 자기는 목회자들에 대해서 굉장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데요. 시골에 있는 자기 부모님을 시골 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잘 챙겨주신데요. 자식들은 다 도회지에서 살고 있어서 부모님을 잘 돌봐드리지 못하는데 목사님이 자식들처럼 그 동네 어르신들을 돌봐드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안 다니는 자기 남편도 목회자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좋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향에 갈 때 마다 꼭 교회에 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온데요.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개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주께서 우리를 두신 이 지역사회에 자신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를 높이기 위하여 함께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소금과 빛은 누가 될 수 있나요? 팔복을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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